헤겔이 하늘을 찌를 듯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베를린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설 자리는 없었다.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힘겹게 얻어 겨우 강의를 개설하였으나, 수강생이 1000여 명이 넘는 헤겔의 강의와는 판이하게 고작 8명의 학생을 앞에 두고 강의를 해야 하는 굴욕을 쇼펜하우어는 경험했다.
그는 자신과 좋지 않은 인연으로 얽혀 있는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쇼펜하우어는 죽기 전까지 30여 년을 은자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프랑크푸르트 시민에게 프랑크푸르트는 세계 그 자체다. 좁고 융통성 없으며, 안에서 보면 보잘것 없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아브델라 인들의 나라와도 같다. 나는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의 학문을 위해서만 살아갈 작정이다.”
그의 결심대로 쇼펜하우어는 평생 동안 그가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살았다. 칸트의 잘 알려진 규칙적인 삶을 모범으로 삼아 쇼펜하우어는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여덟 시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셰익스피어, 괴체, 바이런, 페트라르카 등의 작품을 읽었고,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플루트를 연주하고, 바깥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두 시부터 다시 독서를 시작해, 네 시면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했으며, 저녁에는 연극이나 음악회 구경을 갔다가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밤 열 시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남의 뜻대로 살지 않고 평생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았던 쇼펜하우어였기에, 그는 대표적인 저작의 서문에서조차 자신은 도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책을 쓰지 않았다고 도발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이제 완성된 저서를 동시대인이나 동포에게가 아니라 인류에게 내놓으며, 좋은 것의 운명이 흔히 그렇듯이 이것이, 나중에 가서야 인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는다. 나의 두뇌가 흡사 나의 뜻을 가스르다시피하면서 자신의 일에 끊임없이 몰두한 것은 한때의 망상에 사로잡혀 훌쩍 지나쳐가는 동시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쇼펜하우어는 랜들 콜린스가 말한, 지식인들에게서 가끔 발견되는 내향적 젊의 한 예증이다. 어떤 지식인들은 쇼펜하우어처럼 집중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영위한다.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아니다. 쇼펜하우어와 같은 괴벽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되기 위해서는 쇼펜하우어의 능력뿐 아니라 쇼펜하우어가 그 능력을 키울 수 있었던 그의 조건 역시 매우 중요하다. 만약 쇼펜하우어가 누렸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면 우리는 쇼펜하우어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쇼펜하우어가 될 수 없다.
자기계발서들은 독립과 의존 그 사이에 ‘의지’가 있다고 가르치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독립과 의존 사이에서 돈의 힘을 느낀다. 자유의지만으로 채워진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유의지는 실행되는 순간 자원을 요구한다. 자원 없는 자유의지는 가능때일 뿐이다. 모든 노력에는 자원이 필요하다.
‘어쩌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독립을 부르짖기가 가능할까? 독립이나 나만의 삶, 혹은 나를 위한 삶은 경제활동인구로 편입되기 이전 부모가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 학생 시절에나 가능한 스토리이다. 경제활동인구로 데뷔하고 생존경쟁에 휘말리는 순간 ‘어쩌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간과 쓸개를 집에 두고 직장에 다녀야 한다.
고용에 생존에 목매여 있는 한 독립이 가능할까? 언감생심이다. 고용된 대가로 받는 돈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임금노동자라는 처지를 공유하고 있으면 생존과 독립은 충돌하고,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노예의 길을 선택한다.
가난한 사람은 혼자일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만약 가난한 사람이 혼자라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은 치타델레가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혼자일 수 있기 위해서 집단으로부터 잠시나마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계층의 하한선은 중산층이다.
적어도 증산층까지는 때로는 자신의 적극적 의지에 따라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치타델레에 들어갈 수 있지만, 경제적 자원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그러한 시도조차 해볼 수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치타델레와 같은 상황은 권능을 계발하는 기회이지만, 경제적 하층에게 치타델레와 같은 상환은 삶의 위기를 의미한다.